에베레스트산 정상에 오르면 최초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깃발을 세우고사진을 찍는다. 어떤 나라에서 누가 몇명이 오르고 머문 장소 시간 그리고 한마디 말을한다. 신이 허락해야 오를 수 있다고 또 다른이들이 부러워하며 산 아래 제사를 드리고 산을 오른다. 오늘 이와 같은 일이 높지않은 아스팔트에서 일어났다. 최초로 미국 대통령이 북한 땅을 밟았고 남북미 정상들이 한자리에서 사진을 찍고 북미단독 회담을한다.  최초라는 말이 정상과 더블어 낯설게 느껴진다. 하루종일 같은 지꺼림에 오늘은 볼거리가 없다.

 

1  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눈으로 보지않고 귀로 듣지않아도 머리속 개념을 형상화 시키는것이 상상력이다. 예술과 과학 그리고 삶에 전반을 미래로 끌고 가는것은 사실이지만 진실을 묶고 가는 것이기도하다. 잘못된 상상은 역사와 사실을 왜곡하고 적패라는 심판에 도구로 전락한다. 목마른 이들을 사막으로 인도하고 신기루에 빠지게한다. 상처난 이들은 빗속으로 내몰아 씻김을 받았다 환호한다. 이들이 모두 죽어야 돌이킬수 없는 평화가 온다고 상상한다. 

 

한 사람에 그림자가 많은 사람을 어둡게 만들며 그가 바위 산 같다는 생각이든다. 징을 박고 로프를 걸고 오르려하지만 아래서 보는이는 두렵다. 줄울 쥔 손이 첫 발을 딛기 전 손에서 미끄러진다. 앞서 멀어져간 사람만큼 공포심이 더한다. 잡았던 줄을 놓고 해가 돌아와 이 어두움이 물러나 주기를 상상하지만  정상보다 높은 빈하늘만 보인다.

 

2  하늘과 땅사이 꼭대기

 

위를 보니 하늘이 두렵고 아래를 보니 사람이 두렵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이란 패를 써 십자가 위에 붙인다. 예수는 하늘과 땅 사이 키보다 높은 십자가에 못 박였다. 이스라엘이 장대에 매단 놋뱀을 보고 살아났듯이 이 민족이 예수를 믿고 살아났으면 좋겠다. 산을 오르는 사람은 정상에 오래 머믈지 않는다. 그 이상에 매달리려 하지않는다. 먹을것과 잘 곳을 찾아 내려오고 또 오른다 하여도 세상은 춥고 배고픈 곳이다.

 

서로를 이해하고 친구라 말하지만 응얼진 마음은 막다른곳 까지 손 잡고 갔다가 되돌아선다. 가깝고 먼 이웃처럼 사람이 만든 나라는 생각도 사람과 같다. 하늘나라를 생각하고 하나님과 화해를 외치지만 평화로운 교회는 찾아 볼 수가 없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굴레에서 벗어나 이런저런 모습으로 갈라선 우리는 함께라는 말을 잊었다. 하늘이 천사를 통해 우리에게 처음 전한 소식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이었다.

 

3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화가에 상상이 독특하다. 손가락 끝이 서로에게 달듯한 그림 하늘과 땅이 연결 되어질때 진정한 창조의 완성적 의미가 아닐까.  빌라도는 갈라진 하늘을 향해 손을 내밀지만 예수는 외면한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는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는지라 (요19:8-9) 너는 어디로서냐. 질문 안에 답이있다 다만 그걸 부정하고 정당화시킬 빌미를 찾고싶다. 오르막 보단 내리막이 더 쉬워 보인다. 추락하는자를 세상은 반긴다. 사고 팔 흥정거리가 많아서이다.

 

영웅은 쉽게 태어나지 않는다. 들뜬이들은 자신을 최고로 여기지만 그건 자기만에 기쁨이고 자랑이다. 나는 감명깊은 연설을 들은적이있다. 그건 한국과 일본의 적대적 관계가 최고조로 달할때 대통령이 한 한일 협정 담화문이다. 사람이 행하는 최고의 선은 용서다 하지만 그 용서도 용납을 꺼려한다. 누군가가 하여야 한다면 당신에게서 하나님이 원하시는건 무엇일까.

 

죄인을 대신한 사죄와 용서 사랑 수없이 듣는 이 말이 신앙에 전부인가. 하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죄를 독생자로 갚으신 이유는 당신에 기쁨을 얻기위해서 하신 최고의 선이다. 이것이 꼭대기보다 높은 하늘님이다. 우리의 키보다 높은 십자가는 용서를 용납하고 자신의 아픈 일부를 기쁨으로 받아들일때 진정한 평화가 도래한다. 사랑하는 주에 백성이 멍진 가슴을 담고 살지않기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