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상가로 이어진 큰 빌딩이 있다. 이곳에 진짜는 없다. 모두가 가짜니까 속을 염려도 없다. 사고 팔면서도 소란이 일지 않는 곳 진짜가 없기때문이다. 그런데 한 점포 앞에서 상인이 손님과 실랑이를한다. 진짜를 달라는 것이다. 진짜를 주지않으면 서로를 고발하겠다는 것이다. 손님이 가짜를 사고 가짜 돈을 지불했다. 그는 당연하다는듯이 가짜를 사고 가짜로 주었는데 무엇이 문제냐는 것이다. 캐나다에서 사회적인 문제를 고발한 것이지만 가만이 들여다 보면 그곳에도 파는것 만큼 진짜도 갖고있었다.

 

1  동전에 양면


양면에그림이 다르다고 동전이 가짜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앞과 뒤가 같은 동전이라면 오히려 가짜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양면이 같을거라고 착각하며 산다. 우리 안에 진짜가 존재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 모든 사람을 거짓으로 다 속일수만 있다면 거짓도 진실이라고 포장할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그 주위에서 항시 존재하며 같이 돌고있는 것이다. 우리 안에 진리가 숨겨져 있다면 그것은 포장된 거짓으로 부터 가려져 있을것이다. 마치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외치지만 믿는자는 보이지 않는다.


요한복음을 저술한 사도 요한은 자신에 목적을 분명히 말하고있다. 믿지않는 너희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하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한쪽은 믿고 그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하기 위하여 복음을 기록하였다.(요20:31) . 마치 동전에 한쪽면만을 보고 양면을 보지못한 그들에게 보여주겠다고 선언한 것과 같다. 다른 복음서와 다르게 그는 주께서 행하신 많은 표적이나 이적을 서술하기보단 3일간에 이야기에 촛점을 두고있다. 과연 사도 요한은 설교자들이 말하듯이 초신자들을위해 쓴 글인가 아니면 예수를 알면서도 자신과 뜻이 다르다고 믿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쓴 글인가. 


2  앞면


사람들이 성내거리로 몰려 나간다. 예수에대해 보고 들은 사람들은 흥분해있다. 얼마전엔 죽은 나사로도 살려내셨다는 소문에 줄을 잇듯이 큰 무리들이 몰려든것이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찬송하며 주의 이름으로 오신 이스라엘의 왕이 오셨다. 외치는 소리에 성안이 소란함으로 가득하다. 소망이 없던 사람들에게 예수는 희망인 것이다. 이제 그가 굶주림과 아픔으로 부터 우리를 치유 할것이며 억울함과 억눌림으로 부터 갚아주실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회복 될것이다. 그가 나타낸 표적과 기사는 우리가 오렛동안 기다려온 메시야라고 믿겨 보인다. 우리 모두의 부족함을 대신하여 체울것이라는 기대감에 설레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믿음의 동기가 있다. 한때 교회는 성도들의 간증을 전도로 활용하기도했다. 신유의 은사 병고침을 받으라 성령의 세례까지 들먹이며 자신에 능력이라도 되듯이 자랑을 일삼은적이 있다. 은혜 받은 이들도 자신만이 고침을 받은 것처럼 믿고 흥분해서 성도들 위에 서려한다. 이들의 말에 우리는 물음없이 따라간다. 그래서 우리 동네엔 말씀에도 없는 큰 교회 작은 교회라 나뉘어 부른다. 무엇인가 앞에 보이는 이들에 가려져 눈이 먼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으면 장님이라 말하지만 우리가 믿음을 볼수없는 까닭은 우리 눈이 앞만 보려하고 뒤는 보려하지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은 주님을 따라만 가는것이 아니라 주님의 뒤를 보고 닮아가는 것이다.


3  뒷면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12:32)  사람들은 예수의 이말을 이해할수 없다.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함을 들었거를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요12:34) 흥분한 그들은 자신들이생각한 예수가 다르다고 느끼자 돌변한다. 호산나를 부르던 그들이 하루사이에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친다.

믿는 우리에게도 보이지않는 뒷면이있다. 그것은 가려진 죄의 모습이고 우리 삶에 진실이다.앞에 보이는 것은 거짓된 포장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안고 산다.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시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형제의 어두움이 발견 되어지면 자신도 모르게 어리석은 판단자가 되고만다. 주님의 십자가는 보지 못하는것이다. 또한자신의 어두움도 보지 못한다. 오히려 드러날까 두려워 더 깊게 숨기는것이다. 그들과 다르게 갚음이 없는 죄사함을 자랑하한다.


 나는 교회에 출석을하고 찬양과 감사를 드리고 직분을 맡아 봉사하는 앞면에 모습도 중요하지만 감춰진 내면에 주님의 십자가를 세우는 일은 더욱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죄인이니까 누군가가 나를 보고 죄인이라 한다면 당연한 말이다.주님의 십자가를 볼수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어두움이 드러나고 큰 곤경에 처할때면 자신이 죄인 됨을 고백하고 엎드림보다 감추려한다. 아직 은혜받지 못한것일까. 우리 모두는 주께서 십자가를 대신한 죄인들이다. 이것이 우리에 뒷면이고 주의 사랑을 나타내는 일이다. 하지만 세상은 보이지않는 그림자로 우리를 감싸려한다. 주님의 선택된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살다 절망 할것이다.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