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분주함이 잠시 지나고 한낮에 지친 그늘아래서 돌아갈 준비를한다. 왔던 그데로에 모습처럼 달라진건 없다.  잠시 잊었을뿐 어짜피 돌아가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항시 새로운 것들을 찾고 만나기에 어수선을 떨지만 내게 처음이란 오래전에 묻혀진 기억처럼 비석만이 남아있다.


1  의미없는 출발


해가 바뀌면 사람들이 모인곳에선 새로운 다짐들을 한다. 희망을 부축이기도 하지만 자신에 뜻과는 상관없이 더 많은것을 얻으려는 구호적인 외침을한다. 믿음의 상징인 교회도 세상을 따라간다. 강단에서 설교자들은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며 새술은 새자루에 담자고 외치지만 그들이 만드는 다른 생각으로 자루만 찢겨져 나간다. 버려진 자루속엔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물새듯이 사라진다. 뒤돌아보면 처음과 시작이 멀어진것 같아 아련이 아파오지만 앞선자를 따라가지 못하면 낙인이 되어 버려지는 것이다.


믿음의 시작은 어디서 부터였을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나서 아니면 받고나서 감사에 마음이 열리고 간증이 이루워질때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주고 받는 일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은행에 맡기듯이 이자쳐서 받기를 원하고 주식을 사듯이 꿈에 기도를한다. 교회를 건축하고 많은 사례비를 주며 데려온 종에게 축복받기를 원한다.직분의 나눔은 통장에 찍힌 숫자처럼 적고 많음에 비례한다.이런 교회는 항시 사람들에 소리로 어지럽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주에 길을 예비하라 처음 시작을 외쳤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3:2)


2  멀어진 아픔


예루살렘 성전과 멀어진 한적한 곳에 골고다라는 곳이있다. 버려진 무덤가인 이곳을 라틴어로 번역해 갈보리 언덕이라 부르며 향수적인 찬양을한다. 하지만 이곳은 쓰레기같은 인간들를 모아 버리듯 버림받은 곳이기에 비석이 없다.그 언덕 위로 또다른 죽음을 부르는 십자가가 서있고 그곳에 주님도 매달리셨다. 죽으실때도 자신의 집인 성전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하늘을 향해 크게 소리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7:46)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예수는 성전이 아닌 성전 밖에서 십자가를 지셨다. 나는 그때 성전에 휘장이 왜 둘로 갈라져야만 했는지 마음으로 알것 같았다.


거대한 빌딩 안에 갇혀진 십자가가 날개를 단듯 멋지게 중앙에 걸려있다. 흉직한 모습에 말라 비틀어진 살가죽도 스며든 검붉은 핏자국도 보이질 않는다. 무엇을 먹고 마시는지도 모르게 떡과 포도주가 사이사이를 돌고 갚음이 없는 죄인들이 향연를 시작한다. 그들의 관심사는 누가 제비에 뽑힐것인가. 서로가 적이되어 상대의 눈을 주시하고 단상에선 새술은 새푸대자루에 담자고 외치며 선동한다. 어느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술집과 술꾼들에 소란함만큼 이곳도 골고다에 서있는 십자가를 바라보기엔 너무 먼것같다.

 

3  처음 


사도 요한은 새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 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고 전한다. (요2 1:5) 처음 것이 변해지니까 새로운 것을 찾자고 달려가지만 실상은 처음 그 자리로 되 돌아 가자는 것이다. 골고다의 그 언덕에 땅을 맞데고 세워진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의 발 아래로 그리고 물과 피로서 자신의 사랑을 증거하신 그 자리로 돌아오라는 것이다.우리가 은혜받지 못하고 주님에 사랑을 의심하는 이유는 그 자리를 떠나살기 때문이다. 은혜가 없다면 그 영혼은 상처난 영혼이다. 그들에겐 아쉽게도 주에 구원하심이 없다. 세상을 다투는 그들에 십자가는 이땅이 아닌 벽안에 걸린 벽걸이처럼 장식으로매달려져있다 그안에서 상처난 영혼들은 아픔을부르짖는다. 


제비를 뽑고 피묻은 주님에 겉옷을 갈라 나누듯 오늘도 우리는 자신에 목적을 위해선 서슴없이 그 일을 자행한다. 투구와 갑옷을 입고 창을 든 로마 병사처럼 형제들이 서로를 향해 다투고 죽이는 사람이 되고만다.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요19:24)  세상에서 사는 것이 두려운것이 아니라. 주안에서 행하는 잚못된 우리에 마음이 두려운 것이다. 처음 사랑을 고백 받았던 그 자리로 돌아가자. 형제들이여 그곳으로 같이 돌아가자. 우리가 처음 사랑을 고백했던 그 자리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