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을 느끼고 산다는것 그 자체가 모순 아닐까. 얻기위해 노력하고 실패와 좌절을 맛보기도 한다. 진실은 우린 항시 부족하다는 것이다. 구하는 것이 만족을 얻기 위해서지만 인생의 구함은 끝없이 이어지고 끊겨진 사슬마냥 잘려져 버려진다 오늘 하루의 구함도 주께서 주신 약속을 위한 만나이지만 욕심 많고 배부른 이들은 가르쳐주신 이 기도에 의미를 모른다. 내 안에 작은 밀알을 손 안에 담고사는 의미를 기억조차 않고 산다.


1  데일리 브레드


전쟁과 재난으로 아픔과 고통을 겪는 이들을 보면 일용할 양식은 생명줄과 같다. 다른 어떤 표현을 두지 않아도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은혜의 주를 바라보며 주께서 이 땅을 고쳐주시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멀리서 들리는 울림에 잠시 감정만을 적실뿐 자신들의 구함에 더한 소리를 외친다. 오늘의 일용할 양식이 아닌 평생을 먹고도 쌓아 둘 곳간을 달라는 양심없는 주장만을 되풀이한다. 날마다 거둬드리는 거친 만나보단 한번의 은혜로 모든것을 대신할수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좋은 대학과 직장을 구하고 사업에 운도 따르길 원한다. 살만큼 살았어도 젊은이들 보다 더 살기를 원하고 함께 늙어버린 자식들에게 쓰다남은 유산으로 이어진 복을 받기 원한다. 이것이 우리가 날마다 구하는 일용할 양식이다.


왜 주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말씀하셨을까. 왜 우리는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도 드러내지 않으려해도 솟아오르는 욕심으로 잉태된 죄일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 하였다.(롬 1:21)  생각이 허망해져서 구하려는 일용할 양식으로부터 떠나 사는것이다. 우리들이 드리는 기도는 외침만을 되플이 할뿐 주에 침묵마져 원망한다. 잘못된 생각은 버리지 못하고 하루에 감사함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두움에 갇힌것이다.


2  보는자와 받는자 


많은 성도들이 소망을 위해 기도한다 하지만 실상은 꿈꾸기를 기도한다. 모두라고 말할순 없지만 무엇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수없이 듣고 하기도한다. 당신은 무엇을 구하는가. 사도 바울은 소망에 앞서 믿음을 두었고 소망에 이어 사랑을 두었다. 아마도 소망을 먼저 두지않은 것은 소망은 구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하늘이 정하여 주시지 않으면 얻을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소망을 자신의 것으로 먼져 정하고 믿음을 나타내려한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도 다윗을 왕으로 정하신 것도 사람이 먼져 그 뜻을 품은 것이 아니라 주께서 정하심이었다. 믿음은 자신의 열망을 위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신 소망을 향해 따라가는 것이다. 


학적부를 보면 장래 희망을 묻는 난이있다. 초등시절엔 꿈을 적지만 곧 꿈은 성적순으로 바뀐다. 그래서인지 젊은이들은 꿈을 꾸지않는다. 꿈보다는 현실이 적응되는 보호색이 더 필요하다. 얼굴을 고치고 심지어 성대에 보톡스까지 맞아가며 목소리를 바꾼다.  믿을수 없는 세상에 고개를 돌리고 지금의 삶에 순응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약속이 없는 미래에 거절당하며 살고있다.  가로막힌 담장에 쓰러진 자들를 올라타고 자신도 엎어지고 받침이 되지만 어떤이도.벽을 넘어선 이가 없다. 벽은 우리들의 꿈보다  항시 높게 가려진것이다. 주여 이 땅에 젊은이들에게 약속 된 소망을 주옵소서 가려진 벽은 내 꿈만큼 높아진 것이 아니라. 환상의 흔들림이 우리  눈을 가린것이다. 


3  영원한 양식


사람들은 오래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굶고는 오래 못산다. 사람들은 자신이 인정받기를 원하고 필요 이상의 것을 많이 쌓기 원한다. 하지만 그것이 육신의 욕구를 채우는 자랑이 될진 몰라도 영적인 공허함은 더해 갈것이다. 굶주리는 이들을 보면 아까와하고 그들 앞에 자신을 자랑하며 모욕과 핀잔을 던진다. 반면 가난한 이들은 자신과 같은 이들을 멸시하고 구박하진 않는다. 서로에게 베푸는 동정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진정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다. 이들은 참회의 눈물을 쏟고 자신에 가슴을 두드린다. 넘치게 해달라는 구함이아니라  깨어진 독을 바라보는 것이다. 일용할 양식이 없으면 죽는다는 절박감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이들이 배부른 이들이 볼수없는 교회의 구석진 자리를  찾아간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이들에겐 낮설지 않은 믿음이 존재한다. 그것은 오늘의 내 삶을 주관하시는 주를 내일 일로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오늘의 구함에있다. 한번에 얻어질 믿음이라면 다윗의 시편이 그리 많이 쓰여질 까닭이 없다.  그는 주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절대적 믿음을 소유한것이다. 주에 인도하심을 인지하고 따라가는 것이 믿음이다. 그것이 확신 된 약속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소망이라고 확신한다. 주께서 이끄시는것이 소망이고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믿음이다. 마치 자동차에 앞바퀴와 뒷바퀴가 멀어지지 않고 같이 달리듯이 믿음도 소망도 주안에서 존제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생명을 구하고 얻어진 삶에 평안함을 구한다. 그리고 그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함을 더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