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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고백하는 이들이 시작과 열정을 갖고 달려가지만 목표를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이다. 목회자로서 존경받던 사람이 돈 문제로 구속 되고 2년형 선고를 받았다. 우리에게 그런 소식은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지만 그처럼 무감각하고 완악해진 우리 마음이 더 놀라운 것이다. 예수를 전하는 일에 전념하라고 성도들이 그와 그가족을 살펴 주었더니 거룩한척은 다하고 주의 것을 노력질하는 사기꾼이었다. 장사치들이 만든 교회 문을 들어서면 우편함처럼 무수이 벽에 줄쳐진 헌금꽂이가 막다른 골목처럼 느껴진다. 이곳이 우리의 시작에 끝인 것이다.     


1  시작의 끝


요한은 니고데모의 마지막 모습을 적고있지 않다. 무슨 생각을하며 돌아갔을까. 분명한 것은 그는 버리지 못하고 채우지못한 허전함을  안고 떠나갔을 것이다.예수와의 말을 되세기면서 그것이 진실일지라도 나는 여전히 믿기 어려운 것이다. 너는 이스라엘에 선생이 아니냐고 부끄러운 소릴 들을지라도 내가 입고 갖고 있는 모든것과  바꾸기엔 두려운 것이다. 또한 자신이 그토록 알고자했던 진실이 예수는 우리의 구원자이심이 분명하다고 할지라도 허망하게 돌아설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모든것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믿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니고데모는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이다. 주께서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에게 주신 말씀 안에 녹아져있다. 하지만 길이 막히면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수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막혀있다.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떠난 잘못된 유대인과 바리새인 속에서 더이상 한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절실함을 안고 예수를 찾은 것이다. 주님은 멈춰선 그에게 영생에 길을 가르쳐 주셨다. 마치 잘못된 무리 가운데서 그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사람이 바뀌기만을 다투는 우리들의 니고데모를 바라보신 것이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계18:4) 


2  죽고 사는 이야기


38년간 광야를 돌며 지름길을 찾아 목적한 곳까지 다가 갔는데 주께서 오던 길로 다시 돌아가라 하신다. 이십대에 힘있던 젊은이가 광야에서 반 늙은이가 되었고 지내왔던 모든 고통이 지나쳐 간다. 백성들은 가두어 두었던 분노를 터트리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주께서 불뱀으로 하여금 원망하는 그들을 물어 죽게하신다. 스치는 주검과 두려움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했던 자신들에 범죄함을 고백하고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라 하시고 물린 자마다 그것을 바라보면 살리라 명하신다.( 민21:4-8)

그리고 이와같이 인자도 들려야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얻게하려 함이다. (요3:15)  작은 예수에 한마디가 니고데모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거듭남에 대한 비밀을 가르쳐 준 것이다.


우리 조상은 오랫동안 광야에서 텐트를 치며 이동하고 살았다. 하지만 수백만명의 백성중 배고파 죽은이가 없었고 목말라 죽은 이도 없었다. 백성들이 행진하는 동안은 구름과 불기둥으로 더위와 추위도 막아 주셨고 거주민들에 위협과 심지어 독충들까지도 우리를 상하지 못하게 보호하셨다. 하지만 우리에 마음은 항시 불만과 원망으로 가득 체워져갔다. 피곤하고 고달픈 삶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루가 멀다않게 여호와를 원망하며 따라 온 것이다. 하늘을 향해 날마다 주먹을 위두르고 씻을수도 값을수도 없는 죄만 불리며 살아온 것이다. 하나님을 따른다하면서 사는것이 죄였던 것이다.그리고 우리는 주로부터 죽음에 심판을 받아야했다. 거짓 되고 부패한 마음은 어떤 행위로도 값을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깨달았지만 남겨진 죄에대한 두려움은 우리를 절망으로 가두어 놓았다. 죽음에 그림자가 이미 우리 머리 위를 덮고말았다. 


3  거듭난 사람들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거듭나는 것이 자신이 갖고있는 하나에 악세사리처럼 여기며 산다.. 하지만 회개의 고통이 없이는 거듭날수 없다. 탄생에 기쁨은 산모의 고통에있다. 거듭난다는 것도 절대적인 절망과 두려움이 더한 고통이 있어야 하기때문이다. 다가선 죽음 앞에 아무 것도 할수없다는 절망감 그마져도 상실한 엎드려짐이다. 실제로 죄를 진 자신이 죽지않고는 갚을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 죄와 죽음을 대신 할수있다면 썩어터진 당신의 심장을 모르는 낮선이가 자신의 심장을 주어 희생하고 죽었다면 그마음을 사람에 말로는 표현할수가 없다. 주님은 이마음을 바람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죽음을 뉘우치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장대에 메단 놋뱀을 보라 하셨듯이 당신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바라보라 하신것이다. 


바라보는 것 만으로 그안에 감춰진 진리가있다. 거듭난다는 것은 당신의 예배와 선한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드리는 물질과 직분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버려질 쓰레기같은 나타냄이 아니라 더럽고 추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던져질때 죽음을 따라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당신이 거룩하신 주 앞에서 할수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오직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의 은헤를 믿고 바라볼때 성령께서 당신을 인치시는 것이다. 주님은 막다른 길에서 고뇌하는 니고데모에게 세상에서 얻어진 옷을 벗고 너를 위해 십자가에 들려질 나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영생에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4  끝내지 못한 아쉬움


간혹 이상한 질문을 하는 이들이있다. 성령 세례를 언제 받으셨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자신은 언제였다고 말하는 이들을 보면 거듭나지 못한것이 아닌가 싶다. 마치 자신이 죽어서 비석에 세겨질 날짜를 떠들고 다닌다는 생각이든다.거듭난 자는 바람이 흐르듯이 그 삶이 이어지는 것이다.시간이 지났어도 주를 바라보면 눈물을 쏟는 날이 많다. 눈물 많은 세상에 죄로 살다가 거듭나서 은혜를 바라보고 사는 삶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리고 오늘에 삶도 거듭나는 것이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비석에 날짜가 적혀있지 않다.주님이 말씀하신 영생을 소유하고 있기때문이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3:8)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거듭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니고데모와 같이 떠나지말고 주님 앞에 엎드려지는 거듭남이 있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