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외할머니는 큰 자식에게 집을주고 서울 변두리 외각으로 이사를 왔다. 산 아래 자리잡은 조그마한 집에서 병아리도 키우고 산자락에서 케온 쑥으로 국을 먹던 생각이난다. 항상 풀 먹인 저고리를 방망이로 두드려 입으시던 모습이 멀고도 가까이 느껴진다. 자식에게 더해줄것이 없어 새벽마다 찾던 다윗의 기도는 통곡하지 못하고 삼키는 슬픈 기도였다. 아이들이 건강하고 선하게 자라면 주께서 맡아달라는 간구는 내가 청년이 되서야 끝이나고 나와 막내 삼촌 곁을 떠나셨다.


1  높고도 먼 하늘


기도처럼 하나님께 맡겨진 우리는 훗날 삼촌은 대학 교수가 되었고 나는 목사가 됐다. 그러나 왠지 그 기도의 끝은 보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느낌이든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주에 은혜가 넘치는 것을 보면 높고 먼 하늘에서도 정하신 기도를 하시는가보다. 목사이기에 특별한 기도를 요청 받지만 이어지지 못하고 소멸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확신이 없는 입 바른 소리만 지꺼린다. 왜 기도에 응답이 없냐고 항의하는 사람도 없고 책임질만한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전하고자 하는 마음도 응답을 듣고자 하는 마음도 없이 서로에 모양새만 갖추고 믿음을 고백한다 마치 높고도 먼 하늘을 향해 속죄 못할 거짓을 더하고있다.


어려서 생각한 하늘은 높고 멀기만 하여 작은 아이에 소리는 들을수 없다고 생각한적이있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수 있는 곳 길가에서도 볼수있는 뾰족한 지붕에 넓은 집이다. 그곳은 새벽부터 항시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아버지를 소리쳐 부른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아들이 천대받는 곳이기도하다. 어쩌다 다른 형제와 어울릴 때면 급하게 달려와 너와는 다른 아이라며 모멸찬 말과 함께 갈라놓는다. 그들의 자녀는 나와  다른 세상에 아버지를 갖고있다. 구할 곳이 없는 아이는 하늘이 너무 높고 멀어서 아버지가 들을수 없다고 눈물을 삼킨다. 


.2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11-1) 우리는 신앙인으로 살면서 하는 일이 많다. 예배 찬양 말씀 감사 전도 봉사 선교 성령의 열매를 거두듯이 모든 사람이 나누어서 많은 일을 한다.하지만 나눔이 없이 가장 많이 하는 것이 기도다. 그러기에 믿는이의 생활은 기도라 해도 과언은 아니지만 수없이 하는 기도는 다 정직할까 하는 의문이 선다.  하나님을 속이며 그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고 있는건 아닌지 응답받지 못한 기도는 하나님이 더디 주시는 거라고 위로하는 사람에 말만 삼킬것인지 주님에 말씀을 기억해 보자.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하나님은 우리들에 기도를 듣고 계신다.그러기에 거짓과 위선으로 부터 정직해야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악된 욕망을 구할수는 없어도 죄에대한 용서는구할수 있다. 이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 기도를 자신의 말씀 안에서 찾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요나의 기도는 듣지 않으셨지만 전능자의 뜻을 구하는 다윗에 기도는 응답하셨다. 만약 기도에 응답이 없다면 먼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를 구해야 할것이다. 주님도 자신의 구함보다 아버지의 뜻을 더 소중히 생각하셨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26:39)   


3  내 안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내 아버지는 항시 높고 먼곳에 계시다고 생각했다. 다윗이 구원에 하나님을 부르짖은 것처럼 나는 살펴 주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짖고 살아 온것같다, 이리 치이고 저리 박힐때마다 아버지의 감싸안음을 느낀다. 성령의 소리를 듣기 전까지 부르면서 볼수 없었던 아버지였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높게 보이던 하늘이 나를 감싸고 있다. 그동안 아버지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를 지키며 계셨던 것이다. 나의 소리를 들으시고 내 마음을 살피신다. 이후 나에 기도는 항시 짧은 한마디만를 외친다. 아버지 도와 주세요 저 많이 힘들어요. 나에 아버지는 그 한마디도 알고 계시다는 것을 다 자란후에야 알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라는 말 속에는 나에 형제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 교회 안에도 주님에 마음을 주고 받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다. 모두를 형제라 부르면서 형제가 아닌 사람들이 있다. 불륜의 관계도 아니면서 이복 형제들이 참 많음을 느낀다. 다툼과 소란함 속에서 편가름이 보인다. 하나님의 자녀 처럼 보이지만 사람에 자녀가 교회 안에서 세상에 것과 다툰다. 웃기는 말로 참으로 기묘한 이야기다. 우리 모두가 가까이서 지켜 보시는 아버지를 느낄수만 있다면 조금은 더 형제를 향해 사랑한다고 말할수 있을것 같다. 우리 아버지이니까.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