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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점은 무었일까. 오래전에 나의 조국은 가장 많은 입양아를 보내는 나라였다. 가난과 배고픔으로 길가에 버려지는 아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수십명에 아이들이 노르웨이 공항에 도착하면 낮선 이방인들이 배급을 받듯이 아이들을 안고 사라졌다. 하지만 바르고 행복하게 자란 입양아는 보기 드믈다. 어쩌다 친 부모를 찾겠다고 나서는 이들을 보면 보기에도 기쁘고 가슴이 찡해오지만 그들에 바램은 단지 알고 싶다는 것이다. 부모를 찾으면 용서할수 있냐는 질문에 기억하지 못하는데 무엇을 용서해야 하나요 오히려 반문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가시나무새처럼 아픔을 모르는 것이 더 아프다고 소리치며 고개 숙이는것 같았다. 


1  무엇을 알고 싶은 것인가


한 맹인이 알지 못하는 이로 부터 구원을 받아 눈을 뜨게 되었다. 볼수있는 그들은 알면서도  그가 누구냐고 묻고있는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않던 사실을 믿고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알되 그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는 부정하고 싶다. 그러기에 진실을 거짓이라 말하고 은혜를 죄라고 고집한다. 맹인이었던 자가 말한다. 그는 보지 못하는 나도 알수 있는데 당신들은 알지 못하나이까. 이상하다. 그분이 내 눈을 뜨게 하였는데 당신들은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니 하나님께로 오지 아니하였다면 아무 일도 할수 없으리이다. 보이는 당신들이 오히려 이상하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많은 이들이 주일이면 은혜 받기위해 교회를 찾는다. 말씀과 찬양 기도 성스러운 분위기에 감동스런 한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같은 설교로 두번 세번 반복 되는 그자리는 다시 찾지 않는다. 벌써 받았다던 그 은혜가 흘러간 것이다. 애인은 사모하듯 기다리고 다시 보고픔으로 설레지만 받았다는 은혜는 그렇지 못한가 보다. 주의 말씀이 꿀송이 처럼 달다고 가르치던 선인들에 가르침처럼 달지 않은 것이다. 기다리는 오락이 더 줄겁고 혹여 주에 말씀처럼 이루어진다 하여도 알면서도 믿고싶지 않은 것이다. 밖으로 달려가야 할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2  무엇을 믿는 것인가


우리와 같지 않으면 이방인이 될수 밖에 없다. 그는 왕따를 당한다.수가 많으면 밀려나고 많이 가진 자로부터 쫒겨난다. 그들이 믿는 것은 어설픈 감정에 변화가 아니다. 지금 당장 세상으로 부터 체울수 있는 줄거움이다. 돈을 믿고 지식을 산다. 자식을 믿고 부모를 믿고 줄을 선다.그들이 말하는 모세에 자손인 것이다. 안으로 체울수 있는 것이 육체적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몸으로 죄를 피하며 거룩한척하여도 당신의 영은 거짓을 말한다. 우리 모두 마음 안에 거짓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고통과 애통함이 없다면 구원의 기쁨을 맛볼수 없다. 죄와 구속함은 같은 길에 놓여진것 같아도 다른 것이다. 죄는 죄이고 은혜는 은혜인 것이다. 이론적으로 죄가 없다면 구속함은  있을수 없다. 하지만 죄가 구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하면 믿는자이든 아니든 우리 모두가 죄인임은 분명하다. 몸으로는 죄를 피할수 있어도 마음으로는 아니다. 우리가 구원자라고 고백 될지라도 탐심은 계속해서 우리에 발목을 잡는다. 우리 안에 선한 영과 악한 영이 항시 존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를 믿느냐. 네가 보고 지금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다.


3  그대로 인가 


맹인은 눈을 뜨고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가 어두울 때에도 바라 본것은 구원자와의 만남이었고 눈을 뜨고 나서도 그의 보고픔은 자신을 구원하신 주를  만나기 원함이다. 그리고 그는 믿음으로 주를 바라보며 고백한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우리 집에는 고물들이 많다. 이사할 때마다 새것이 장만 되어지면 이전 것은 저절로 갇히는 것이다. 버리지 못하는 미련이다. 하지만 죄는 우리 안에서 버려야 될 고물이다. 그대로 있어서는 안된다. 잊혀진 것처럼 모르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가시나무새처럼 이는 바람에 고개를 숙이고 아픔을 모르는 것이 더 아프다고 소리쳐야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자신이 주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고백 되어질때 죄는 버려지는 것이다. 내일 혹여 새로운 죄가 유혹 되어도 마음에 두지못할 것을 알기에 주께 더한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버려야 될 쓰레기를 안고 산다면 당신에게 은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목사의 설교도 성스러운 찬양과 기도의 올림도 교회 안에서의 선한 행실도 다 부질없는 짓이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9:41)  주의 말씀에 들림이 되었다면 마음에서 거친것들을 버리고 돌아서서 믿음으로 주를 바라보자 내가 나를 믿느냐. 주여 저는 가시나무새와 같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