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개운치 않은 말이다. 사랑한다며 만족못할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되 묻는다. 모든것들을 담지 못하고 버릴수 조차 없다면 붙잡지말고 흐르게 하는것이 나을까. 의심과 원망이 교차되고 반복하는 이 사랑에서 자유롭고 싶다.


1  엇갈리는 마음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수 있을까. 이유가 있다면 감춰둔 미련과 욕망 그리고 아픈 원망일 것이다. 짙은 어둠에 죄를 감추듯 표면적게 드러내는 거짓 된 마음은 치유못할 다른 상처를 새긴다. 사도 바울은 죄를 논하면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어졌나니 (롬1:21) 하나님을 안다면 알지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이 죄라는 것이다. 우리에 잘못된 생각이 어두운 마음을 만들고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대적한다.


오랜 세월을 교회에서 자라왔지만 아직도 젖먹이 어린 아이다. 많은 형제들과 친교하면서 주의 영광을 흐리는 말들만 듣고 살았나보다. 내 입술과 귀가 썩는지 모르고 듣고 말하던 날들이 후회스럽다. 아이야 비록 잘못된 종들이 네 눈에 비친다 하여도 주님의 몸된 교회를 향하여 악한 말을 삼가하라. 네 입술이 먼저 하나님을 알기에 힘쓰고 네 생각이 주님의 판단하심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져라. 헛된말에 동요하거나 동조하지말고 네 마음을 다스리는 묵상이 네 기도가 되어 하늘에 열랍되기를 원한다. 죄에 시작은 주를 알지 못함이 아니라 알면서 행하는데 있다. 하지만 알면서 다른 뜻을 품는다면 진리에서 멀어졌거나 모른척  외면하는 믿음 없는 자 일거다.


2  도둑과 강도


한국에 저명한 신학자이며 목회자들이 종말을 설교하지 말라는 기독신문에 실린 글귀를 보았다. 사악한 종교자들이 종말을 돈벌이로 이용하고 사람들을 현혹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인들 마져 종말을 잊고 살아서는 안된다. 종말이 곧 부활에 신앙으로 연결 되어지기 때문이다.주님이 오시고 마지막때 종말이 시작됐음을 많은 예화로 말씀하셨다. 말씀을 돈벌이로 생각하는 사람은 모은 돈을 쓰고자 종말이 와서는 안되지만 종말을 믿고사는 우리가 외면하고 산다면 그들과 다를게 없다.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마25:3-4) 지금 우리가 성령에 등불을 가져 갈 때이다. 

복음과 율법이 다른게 있다면 율법이 할수없는 것을 복음이 자유케 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선한 법은 우리 육신이 연약하여 할수 없음을 하나님이 대신하여 하셨다는 것이다.(롬8:3-4) 도둑은 이 복음을 제것마냥 훔쳐서 장사를 하고 강도는 자유케하신 복음을 주인인냥 되 팔아 다시 율법에 매이게한다. 우리가 사랑으로 부터 흔들리는 이유이기도하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그 목적을 분명히 우리에게 전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1).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다면 또 다른것을 듣고 흔들릴것이 아니라 이젠 복음의 진리를 듣는것 만이 아닌 마음에 품고 따라 사는 것이다. 이것만이 도둑과 강도의 위협으로 부터 벗어날수있다. 


3  결혼


사랑한다고 모두가 다 함께 사는것은 아니다. 멀리있어도 사랑하며 산다. 나는 한 아이에 아버지지만 세상엔 많은 나의아들들이 있고 형제들이 있다. 변해가는 세상은 결혼에 의미를 동거에 두고 이성이 아닌 동성도 결혼을 하고 부부로 인정한다. 다르다는 것을 밀해도 다를것이 없는 세상이다. 의식적인 사고가 변한것이다. 이들에게 진리는 한갖 말장난에 불과하다. 교회는 비어가고 새로운 집단이 형성 될것이다. 순결한 신부는 거리에 창녀로 타락하여 사생아를 낳는다.  냄새나는 거리틈에 버려진 골목은 어둡기만하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요일2:1-2).


죄는 지극히 악하여 그 자체가 심판에 두려움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죄인이어서 심판을 피할자가 없다. 너와 내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세상에서 먹고 입고 갖은것은 의미가 없다. 하지만 죽음섞인 절망은 새로운 희망을 바라보게한다.그것이 복음이다. 진리는 신부의 허믈을 벗길 신랑에게 인도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하시지만 사람에 아들로 오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신다. 그는 의로우셔서 자신을 화목제물로 삼으시고 용서 하신다. 신랑은 신부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고백한다. 사랑을 되묻는 신부의 입에 입맞춤하며 너와 함께해 영원하다 말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