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선 이에게 사랑한단 말을 들으면 경계에 벽을 세우고 바라볼것이다. 반면 만족할만한 차림새와 유혹을 손에 쥐고 말하면 대부분 호감을 품고 바라볼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그리 말하고 그리 얻어지는게 아니다. 

 

1  빌려주는 사랑

 

우리는 사랑을 한다. 흔히 말하는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 드려진 감사도 이해 관계가 다르면 수를 센다. 이혼 할 부부마냥 밥솥까지 니것 내것으로 가른다. 어쩌면 우리에 사랑이란 봉투를 전해주고 그 안에 이자를 가득히 돌려받기를 원한다. 예전에 품었던 환상이 깨지고 주었던 믿음이 조금씩 갈가 먹힐때면 빠른 정리에 들어간다. 우리는 되돌려 받기위한 빌려주는 사랑에 익숙하다. 그래서 서로에게 멍들고 아프다.

 

제자들은 생업을 버리고 가정을 떠나 적극적인 헌신에 모습을 보였다. 베드로에 말 처럼 우리가 우리에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눅18:28) 그들은 자신에 적극적인 사랑이 세상에서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오늘 날 우리에 모습과 별다름이 없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수십 수백배에 갚음을 약속한다. 믿는이도 없고 속을지라도 사기꾼이라 말하지않는다. 혹여 하늘 아버지에 뜻이라고 포기하고 넘어갈지라도 버릴수없는 미련은 더욱 더 매달림을 강요당한다.

 

2  돌려주는 사랑

 

사랑은 주는것 보다 돌려받기에 더 익숙하다. 만삭이 다된 임산부의 부풀려진 배 마냥 칭찬과 자랑으로 나팔을 불고 곡으로 세긴다. 작자 미상에 곡은 없다. 우린 이런 에로스의 사랑에 깊이 젖어있다. 어쩌면 보편적 사랑이 절대적 가치를 상실케한다. 악한 부모 못된 자식 남보다 못한 형제 원수같은 부부 나쁜 이웃 이 모든게 돌려받지 못해 부도난 사랑에 이름이다.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받기를 바라고 사람에게 빌리면,---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눅6:32-34) 우리는 죄인보다 못한 악한 사랑을 한다.

 

세상은 주고 받는것에 익숙하지만 받은것을 돌려주는건 어려워한다. 이해타산을 부르기 떄문이다. 강단에 선 설교자도 선지자의 의도와 다르게  하나님에 것을 떼먹거나 훔치지 말라고 성도에게 막말을 던진다. 하지만 받는이에 마음이 너그럽고 풍요하다면 사정을 이해하고 기다려 줄것이다. 은혜에 대한 결실은 감사만이 아니다. 은혜가 은혜인것은 상대에 대한 오래 참음과 기다림에 있다. 

 

3 아파하는 사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날마다 마음 깊게 암송한 귀절이다. 하지만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을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외치게 될것이다. 마치 우리가 듣고 말하는 신앙과 같다. 하나님의 마음과 상관없이 자신의 헌신과 봉사와 사역을 통해 당연히 보상이 인정받게 될 것이라 억측한다. 독생자를 죽음으로 내어준 아버지에 아픈 사랑은 기억하지 못한다.

 

잃은 양을 찾아나선 목자처럼 온길을 더듬어 반복하며 애타게 찾는다. 혹여 지금은 찾지 못할지라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은 문을 열고 불을 밝혀놓는다. 초대 교인들은 핍박받는 세상에서 하나님에 말씀을 전하고 아픈 이들을 치유할 능력이 예수에 이름으로 이뤄지게 해달라고 소망한다.(행4:29-30) 이것이 교회에 사명이다. 이 땅은 신음하고 아파하고 바라보는 하늘도 기다리며 아파한다. 세상에 지친 나는 전달 못한 아픈 사랑을 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