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말씀에 종교이다. 천지만물 모든것들이 주에 말씀으로 이뤄졌다. 진리는 가라사대로 시작해서 아멘으로 말하지만 심는 이에 마음은 각기 다른 말을 뿌린다. 밭엔 알곡도 자라고 가라지도 자란다. 추수때가 되면 알수있지만 살면서 헛된 말만 심고 산것은 아닌지 돌아보게한다. 세상에 뿌려진 하고 많은 말들이 진리에 대항한다. 알것 같으면서 모르듯이 말하고 모르면서 알듯이 거짓을 말한다.

 

1  가라사대

 

진리는 모든것을 안고있다. 믿음은 진리에 대해 부분적으로 알려질뿐이다.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져 알것 같은 다른 말을한다. 어쩌면 우리도 진리에 대해 안다는것은 표면적 느낌에 잔상일지도 모른다. 진리를 믿는다고 말할때 사이에 건너야 될 구릉이있다. 가라사대 하나님이 가라사대 마음이 열리고 거친것과 더러운것이 내 안에 씻김으로 울린다. 버리지 못한것은 새로운 의미를 만들수 없다고 말하지만 진리는 버려지는것이 아니라 씻김으로 되 간직되는 것이다.

 

진난 세월은 모로고 산것일까 듣고 산것일까. 모르는것은 들은것을 외면한것일뿐 하늘도 산도 바다도 내 안에 다 그려지는데 정작 잊은것은 그에 말이다 가라사대 존재는 알되 존재자는 모른다. 누구에 말도 아닌데 세상이 그를 미워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내 가족이 있고 형제와 이웃이 있다. 그들이 모로쇠로 일관하는 이유는 말을 듣고(설교) 말을 보이고(기도) 말을 전하고(행위) 듣는것으로 가장(사람에 말) 되었다면 그들에 무시함은 당연하다.

 

2  그 사이

 

사람들은 어렴풋이니마 목적지를 정하고 산다. 교회도 신도들에게 목적지만을 환상시킨다. 처음부터 벗어난 길이었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다.  원하든 원치않든 다다른 곳에서 지난 길에 대한 물음은 존재한다. 누구를 만나고 어떻게 살았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였는가. 당신의 자유로움이 전능자의 마음을 벗어났다면 그 사이에 무엇이 존재하는가. 넓게 꺼져버린 늪지에 빠지기도하고 돌아서기도한다. 이 구릉같은 세상에서 더럽히지않고 깨끗하게 벗어날 자가 존재할까.

 

창조란 말은 새로운것을 의미하기도한다. 세상이 죄로 더럽힘을 입었더라도 창조안에 새 하늘과 새 땅이있다.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에 니고데모가 이해 못하듯 신자는 눈감고 회계하면 죄사함으로 거듭난다고 쉽게 생각한다. 진정한 회계란 죄를 돌이켜 원래에 자리로 돌아가야함을 의미하고 성령은  예수의 피로 죄사함과 인치심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하나님의 말씀엔 더함도 덜함도없다.

 

3  아멘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말씀을 주셨다. 율법과 진리는 거울과 같아서 듣고 받는것만으로 믿음이 다 소유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육신에 정욕과 세상을 이길만한 능력이 없음을 부끄러워해야한다. 성도들이 동거하는 이세상은 죄로 질서가 파괴된 곳이다. 우리에겐 아직도 율법에 지킴이 필요하고 말씀에 순종해야한다. 왜 이스라엘을 위해 모세를 부르고 믿는자를 위해 성령을 보내셨을까. 세상은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죄를 먹고 산다.

 

고여진 곳에서 멱을 감듯이 목만 내놓고 손 발이 허우적거린다. 죄에 담긴 몸은 머리 속 생각만을 말하고 머리통 마져 들락거린다. 젖은 타울을 내던지고 마른 옷으로 갈아 입지만 가려진 사이에 감추인것이 보인다. 하나님과 그 사이에 담겨진건 무엇일까. 땅은 죄를 삼키고 은혜는 하늘을 향한다. 우리들에 의지에 상관없이 하늘은 스스로 존제감을 나타낸다. 시작과 끝은 동일하다. 아멘은 진리의 시작을 의미하고 생명의 불을 밝힌다. 가라사데 있으라 함에 생명이 창조 되었음을 아멘으로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