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피는 별들중 눈에 띄게 빛나는 별이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이다. 이 별을 찾으면 가장 빛나는 북극성을 찾을수있다. 보지못한 많은 별들이 떨어지고 새롭게 생겨나지만 어려서 부터 본 이 별은 변함이 없다.  하나님도 일곱개에 빛나는 별을 변함없이 사랑하신다. 네가 본 것은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계1:20)


1  에서버두사빌라


사랑이 사라지면 미움과 원망과 버려짐만 남는다. 이처럼 사람사이에 관계가 어긋나는 것도 사랑을 돌이킬수 없기때문이다. 이기적인 세상에서 자기 성향이 강하면 타인이 해를 받는다. 고난이란 상대의 억눌림에 숨쉬기조차 어렵다는 외침이다. 이 모든 고통이 자기만에 즐거움을 찾으려는 쾌락주의를 만들고 돈이 우상이 되고 도덕적 문란으로 비약한다. 사치와 성적인 향락등 자신이 만든 우상에 만족하고 사는 가면 쓴 짐승들이다. 썩은 과일도 믹사기 안에 갈아버리면 빛깔 좋은 달콤함에 취하듯 우리는 가려질 심판도 잊고 산다. 이처럼 은혜에서 멀어진 이들이 교회 안에 있다. 덥지도 차지도 않게 구분못할 보호색을 입고 우리 모두를 죽은 교회라 말한다.


인기 드라마 주인공처럼 과거의 사람과 통화할수 있고 사건을 바꾼다해도 오늘에 달라진 상황은 또 다른 갈등을 만든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미래를 준비가 아닌 완성하심으로 마치셨다면 지금에 내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변화 될것이다. 이런 불가항력적인 사랑을 은혜라고 말한다. 은혜는 내가 원하는것을 얻었다는 기쁨이 아니라 정하신대로 돌이켜짐이다. 죄에 대한 회계도 정하신 구속의 역사가 없다면 일어날수 없다. 주님의 손에 붙들린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엔 변함이 없다. 그러기에 우리가 쉽게 함부로 말하는 종들에 대한 모욕도 교회에 대한 비난도 주님을 향한 손가락질임을 기억해야 할것이다.  


2  위험한 상견례


자식에 혼사를 앞두고 양측 부모가 만남을 갖는다. 예식을 준비하고 신랑과 신부 그리고 가족끼리의 예를 갖추고 혼인을 준비하기 위한 만남이다. 자녀들의 앞날을 염려하고 서로에게 배려하고 더하려는 마음이 훈훈한 기쁜 자리지만 식을 위한 절차의 예도 웃 어른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도 심지어 서로에게 하는 예물조차 내키지않는 마음으로 하지않기를 원한다면 그건 상대를 무시하거나 두사람의 결혼을 반대한다는 의미 일것이다. 우리들의 혼약이 이런 어리석은 만남으로 상처를 받고 돌아서서 주님을 바라본다.


주님의 신부인 교회가 세상을 핑계로 사랑을 버리고 섬기는 마음마져 지우려 한다. 술에 취할 큰 집을 찾아 만들고 감춰둔 예복을 입고서 신랑 신부 놀이를 한다. 하지만 새겨질 사진은 걸지못할 부끄러움으로 장식 될 것이다. 니골라당이나 발람의 행위처럼 죄를 짓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지럽히는 행위 불평과 불만 이간질로 사단에 모임을 만든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며 세상을 사랑하는 미지근한 믿음은 버려진 첫 사랑으로 부터 책망을 받게 될것이다. 말씀에서 떠난 믿음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과 같다. 실로 이런 자들이 교회 안에 있을지라도 짙은 어둠에 버려질 것이다.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 (렘 6:19)


3  죽 쒀서 개 줬다 


영어권에 있는 아들에게 이 말을 하면 주인이 개에게 슾을 만들어 줬다고 뜻과 다른 좋은 해석을 한다. 후회와 낙담을 표현한 말인데 듣는이가 전혀 다른 생각을 한다. 잘못 전달된 마음은 말씀에서 더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 자신이 축복으로 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체 달려간다. 주님에 마음은 어떠실까. 자신이 피로 갚으시고 정결케 하신 교회가 간통과 온갖 추잡함으로 신랑을 욕되게 한다면 그 예복을 벗기실것이다. 하지만 비록 밥이 아닌 죽이 되고 버려진것이 아니라 개라도 줄수있다면 조금이나마 은혜 받기를 원하는것이 부모에 마음이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마15:21-28) 


하나님이 보시는 믿음의 시각과 우리들이 생각하는 믿음의 시각이 전혀 다르다. 우리는 양과 크기로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질을 보신다. 일곱 교회에 관한 말씀중 한가지 이상한 점은 우리가 크게 부풀리며 강조하는 감사에 대한 책망이 없다. 헌금을 믿음인 것처럼 일관하여 말하는 우리에겐 충격이지만 크다 작다를 가지고 판단하지 않으신다. 오직 일곱 교회에 대한 판단은 죄와 순종이다. 신랑은 신부인 교회에게 신랑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다. 순종이 없는 믿음이란 없다. 순종하는 마음 안에 모든 진리가 숨겨져있고 드려지는 예배와 감사에도 말씀을 지키려는 순결한 마음이 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리라 (삼상15:22)  순종은 축복을 얻고 다가올 심판의 자리에서 사함을 얻는다. 순종이란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들의 마음이기 때문이다.